누가 버지니아 늑대를 겁낼까 봐?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이 출연한 영화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의 한 장면 © 1966 Warner Bros.

 

제목을 중심으로 읽어보는 세계문학: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애드워드 올비(Edward Albee)의 희곡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Who’s Afraid of Virginia Woolf?](1962)의 제목처럼 흥미를 끄는 제목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유명한 문학가의 실명이 들어 있는 점이 이채롭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 [올랜도], [등대로] 등의 널리 알려진 소설, 그리고 페미니즘 저작의 고전이 된 [자기만의 방]을 쓴 20세기 초의 작가입니다. 예민한 정신을 견디지 못하고 1941년에 강물에 투신하여 자살하였습니다. 실존 인물의 실명을 내세운 올비의 이 희곡은 바로 그 버지니아 울프와 관련된 사건을 다룬 작품일까요? 아니면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 그녀가 가졌던 삶의 어떤 면을 상징하거나 암시하였을까요? 거기에 우리가 두려워할 만한 어떤 요소가 있었을까요?

제목의 유래

올비가 버지니아 울프의 예사롭지 않은 사상과 삶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제목에는 더 직접적인 사연이 있습니다. 올비 자신이 제목의 유래를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술집 거울에 누군가 “Who’s afraid of Virginia Woolf?”라고 비누로 낙서를 해놓은 것을 보았는데 그 말이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자기가 쓰려는 작품의 주제를 잘 나타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물론 이 낙서가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아기 돼지 삼형제]를 통해 널리 알려진 동요 “Who’s afraid of the big, bad wolf?(누가 깡패 늑대를 무서워한대?)”의 한 구절을 누군가 바꿔 쓴 말장난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아기 돼지 삼형제]에서 돼지 형제들 가운데 막내는 늑대를 막을 수 있는 튼튼한 집을 지어야한다고 하면서 벽돌집을 짓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막내를 비웃으며 “누가 깡패 늑대를 무서워한대?” 하면서 튼튼한 집을 짓지 않습니다. 형제 돼지들이 늑대를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공연한 허세를 부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늑대가 나타내자 기겁을 하고 막내의 집으로 피합니다. 여기에서 늑대는 대면하기 두려운 무서운 현실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형제 돼지들은 두려운 현실을 마주하기 두려워 그롯된 환상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술집 거울에 낙서를 한 사람이 어떤 생각에서 “깡패 늑대” 자리에 버지니아 울프를 넣었는지는 모릅니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그 낙서자는 여성혐오자인지도 모르고, 아니면 버지니아 울프의 문학적 성취를 질투한 작가 지망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올비는 이 낙서를 자기 나름으로 해석하였습니다. 그 낙서에서 [아기 돼지 삼형제]의 동요에 함축된 뜻이 떠올랐고 그것이 그가 쓰려고 생각 중이던 작품의 주제와 잘 맞아 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 구절을 “그릇된 환상을 갖지 않고 사는 걸 누가 무서할 줄 아느냐”라는 뜻을 가진 말로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깡패 늑대” 자리에 버지니아 울프가 들어가면 함축되는 의미가 더 풍부해지리라 보았을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

작가가 이 희곡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은 교양과 지식을 갖춘 사회 엘리트 계층 삶의 진실된 모습입니다. 그는 우아하고 교양 있고 다정한 관계로 이루어져 있으리라 기대되는 부부의 삶이 실은 저열하고 야비하고 추악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극은 밤늦은 시간 어느 대학의 교수 파티에서 돌아온 교수 부부간의 대화로 시작합니다. 남편 조지는 이 대학 역사학과 교수이고 부인 마사는 이 대학 총장의 딸입니다. 마사는 남편이 총장의 사위로서 능력을 발휘해 두각을 나타내 대학에서 힘있는 지위에 오르기를 바랍니다. 조지는 야심을 가지기를 바라는 마사의 그러한 태도에 환멸을 느낍니다. 두 사람은 결혼했을 때 가졌던 기대와 환상이 깨져 이제 서로에게 깊은 실망을 느끼고 서로를 경멸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갈등은 극에 이르렀습니다. 극의 대부분은 술에 취한 부부가 서로 상처를 주고 헐뜯기 위해 사용하는 더할 수 없이 자극적인 대화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부부간의 갈등은 새벽 두 시에 손님으로 온 젊은 교수 닉과 그의 부인 허니의 합석으로 더 복잡해집니다. 닉은 신임 생물학과 교수입니다. 조지는 생물학을 야유합니다. 그리고 닉에게 총장의 딸인 마사를 유혹하여 대학에서 힘을 얻으라고 빈정거립니다. 이에 반발하여 마사는 조지에게 상처를 주려고 그 앞에서 닉을 성적으로 유혹하기도 합니다. 조지와 마사, 조지와 닉 사이의 긴장과 갈등은 점점 높아지고 마사와 낙 사이의 음란한 행위가 암시됩니다. 나중에 가서는 조지가 마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들 사이의 싸움이 고조되면서 숨겨졌던 사실이 조금씩 드러납니다. 조지에게는 부모와 관련된 고통스러운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이 암시됩니다. 조지와 마사가 아이를 갖지 못한 것이 고통과 갈등의 원인이었다는 사실도 밝혀집니다. 우연히도 닉과 허니도 아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허니가 낙태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극에서 아이의 존재는 의미심장한 상징이 됩니다. 허니와 닉은 낙태한 사실을 숨기고 상상임신이라는 환상 속에 살아 왔고, 조지와 마사는 아이가 없는데도 아이를 가지고 있다는 환상 속에 살아왔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조지는 가상의 아이를 죽이는 이야기를 통해 더 이상 환상 속에 살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이 극은 밤늦게 파티에서 돌아온 교수 부부, 그리고 새벽 두 시에 들어선 젊은 교수 부부가 술에 취해서, 그리고 새벽까지 계속 술을 마시면서 서로를 조롱하고, 야유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증오의 언어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교양 있는 계층 사람들 사이의 대화라고 상상할 수 없는 극단적이고 지저분한 표현으로 가득 차 있고, 음란한 행동과 폭력적 행동까지 등장합니다. 이 극은 발표되고 나서 비평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저명한 문학상 수상 후보에까지 올랐습니다. 하지만 문학상 주최측은 이 작품이 지나치게 수치스러운 가정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이유로 상을 주지 않았습니다. 올비의 이 희곡은 미국인의 행복한 가정 이미지를 깡그리 깨부수는 충격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우리가 문학을 읽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현실을 떠나 잠시 현실 삶의 고통을 잊고 허구의 세계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일지도 모릅니다. 문학은 환영을 통해 우리가 기대하는 삶의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위로해 주고 우리의 고통을 견디게 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문학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문학은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우리 앞에 드러내 보여줍니다. 우리가 잊고 싶었던 것들, 우리가 확인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더 가차 없이 잔혹하게 우리 앞에 드러내 보여줍니다. 작가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는 더 나은 방법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에드워드 올비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도 우리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 삶의 진짜 모습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입니다.

제목의 우리말 번역

작가는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라는 말을 극 중에 여러 번 되풀이하여 나오게 하였습니다. 마사가 교수 파티에서 아기 돼지 삼형제의 동요를 누군가 그렇게 바꿔 부른 것을 듣고서 그 대목을 다시 흥얼거리면서 남편 조지에게 재밌지 않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런 장면이 여러 번 나옵니다. 이러한 물음은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있는 조지의 마음을 아프게 건들이는 듯합니다. 마사와 조지가 함께 그 노래를 흥얼거리는 장면들도 있습니다.

이 작품 제목의 우리말 번역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는 극작 제목으로서 멋지고 인상적으로 여겨집니다. 이 제목이 작품을 읽게 만드는 한 역할을 한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원작 제목이 영어권 독자에게 불러일으키는 느낌들이 이 번역 제목에 잘 나타나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한국어 독자는 이 번역 제목에서 [아기 돼지 삼형제]에 나오는 동요의 한 구절을 떠올릴 수 없습니다. 영어권 독자는 이 제목에서 아기 돼지 삼형제의 동요와, 그 동요의 맥락, 그리고 그 동요의 멜로디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 제목에 들어 있는 말장난도 쉽게 이해합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울프(Woolf)”는 늑대를 나타내는 “울프(wolf)”와 발음이 같습니다. 작가 이름 “버지니아”도 미국의 “버지니아 주”를 나타내는 말과 발음이 같습니다. 따라서 발음으로만 들으면 이 희곡의 제목은 “누가 버지니아주 늑대를 겁낼 줄 알아?”라는 말로도 들립니다. 영어권 독자는 이 작품의 제목에서 문학사적 인물 버지니아 울프, 아기 돼지 형제, 그리고 버지니아주 늑대의 세 가지 이미지를 동시에 떠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올비는 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버지니아 늑대”라는 말은 우리에게 “강원도 맷돼지”라는 식으로 말하는 기분이 드는 표현입니다). 번역에서는 원래의 발음이 사라지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번역의 한계입니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라는 번역의 대안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