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H. Auden, “Funeral Blues”

Funeral Blues

W. H. Auden

Stop all the clocks, cut off the telephone,
Prevent the dog from barking with a juicy bone,
Silence the pianos and with muffled drum
Bring out the coffin, let the mourners come.

Let aeroplanes circle moaning overhead
Scribbling on the sky the message He is Dead.
Put crepe bows round the white necks of the public doves,
Let the traffic policemen wear black cotton gloves.

He was my North, my South, my East and West,
My working week and my Sunday rest,
My noon, my midnight, my talk, my song;
I thought that love would last forever: I was wrong.

The stars are not wanted now; put out every one,
Pack up the moon and dismantle the sun,
Pour away the ocean and sweep up the woods;
For nothing now can ever come to any good.

장송 블루스

W. H. 오든

시계는 죄다 멈춰라 전화도 끊어라
개에게 뼈다귀를 주어 짖지 말게 하라
피아노는 치지 말고 북은 소리를 죽이고
관을 내어 놓고 조문객들을 맞으라

머리 위에 비행기를 띄워 애도하고
하늘에 “그가 죽었다”는 글자를 쓰게 하라
비둘기들의 흰 목에 검은 상장(喪章)을 두르고
교통순경에게 검은 면장갑을 끼게 하라

그는 나의 동, 서, 남, 북이었고
내 나날의 노동, 내 일요일의 휴식
나의 정오, 나의 자정, 나의 대화, 나의 노래였다
나는 사랑이 영원하리라 여겼으나 틀린 생각이었다

이제 별들은 필요 없다 다 꺼 버려라
달도 치워버리고 해도 없애 버려라
바닷물도 빼버리고 숲도 없애 버려라
이제 어느 것도 다 소용 없나니

(번역: 지하서재)



W(ystan) H(ugh) Auden (1907-1973)

영국 태생의 시인. 1930년대 대공황기에 좌파 문인의 중심 인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의사였던 아버지와 간호사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처음에는 과학에 관심이 두어 생물학을 공부하였으나 1922년에 시인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1925년에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해서 그곳에서 시인으로서의 이름을 날렸습니다. 데이 루이스(C. Day Lewis), 루이스 먹니스(Louis MacNeice), 스티븐 스펜더(Stephen Spender) 등의 시인에게 많은 영향을 미쳐 이들의 이름이 오든과 함께 거론되는 수가 많습니다. 저널리즘에서는 이들을 보통 <오든 그룹 Auden Group>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혁명적 정치학을 가진 대표적인 좌파 시인 그룹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오든의 시 경력은 흔히 네 단계로 구분됩니다. 제1기 (1927-1932년): 카를 마르크스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사상에 영향받아 사회의 문제와 병리를 심리학적으로 접근하고 진단하던 시기. 그는 시의 기능을 사회 병리의 치료로 보았습니다. 제2기 (1933-1938): 좌파 정치 사상의 중심 시인이 된 시기.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분석하고 전체주의의 등장을 경고했습니다. 소설가 친구 크리스토퍼 이셔우드(Christopher Isherwood)와 함께 정치성을 띤 여러 편의 음악극을 썼습니다. 제3기 (1939-46): 미국 시민으로 귀화하여 종교적 지적 사고에서 결정적인 변화를 맞는 시기. 기독교적 색채가 강해집니다. 1948년에 <불안의 시대 The Age of Anxiety>로 퓰리쳐 상을 받습니다. 제4기 (1948-): 매년 유럽을 방문,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지에 머물면서 친구 시인 체스터 칼만(Chester Kallman)과 함께 오페라 대본(opera libreto)을 쓰기도 하고 평론과 시집을 편집하기도 하고 번역을 하기도 합니다. 이 마지막 시기에 그는 볼링겐 상(1953), 전미도서상(1956) 등 많은 상을 받습니다. 1956-61년에는 옥스퍼드 대학 시학 교수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W. H. Auden: “Funeral Blues”

이 시는 애도시(elegy)의 일종입니다. 애도시는 보통 특정한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시를 말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실제 인물이든 가상의 인물이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시를 다 포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문학에 애도시의 제목으로 Funeral elegy라는 제목을 가진 것들이 여럿 있는데 오든은 elegy라는 말을 사용하는 대신 blues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blues는 흑인 음악 전통에서 나온 슬픈 음악을 말합니다. 오든은 이 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듯합니다. elegy라는 표현 대신 blues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격식을 벗어버린 느낌과 약간의 아이러니의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이 시는 영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에서 낭송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통해 유명해진 또 한 편의 엘레지는 A. E. Housman의 “To an Athlete Dying Young”입니다. 이 시는 “Out of Africa”에서 메릴 스트립이 로버트 레드포드의 장례식에서 낭송합니다.)

이 시에서는 죽은 사람의 이름이나, 화자와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냥 He라고만 되어 있을 뿐입니다. 전통적인 애도시에서는 주로 시인들의 절친한 남자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는 시가 많기 때문에 이 시에서도 애도의 대상이 남자인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죽음의 충격이 동성간의 우정 이상의 어떤 절대적인 사랑인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오든의 동성애를 암시하는 시가 아닌가 하는 논란이 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의 화자를 반드시 시인 자신이라고 봐야 할 근거도 없기 때문에 그런 논란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 시의 화자, 곧 persona는 여성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소월의 ‘진달래꽃’의 persona가 여성이듯이 말입니다.) 독자는 이 시의 화자가 표현하는 상실의 극단적인 슬픔의 방식을 감상하면 될 것입니다.

1연
이 시는 누군가를 잃은 사람이 이를 애도하기 위해 주변에 여러 가지 일을 지시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계를 멈추게 하고 전화를 끊게 합니다. 개를 짖지 못하게 하고 피아노를 멈추게 합니다. 북소리는 내되 (장송 음악으로서) 낮게 내도록 합니다. 이곳의 명령은 일상의 중단을 뜻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의 죽음 뿐 아니라 동시에 나의 죽음, 내 삶의 죽음, 내 세계의 죽음을 뜻하기 때문일 겁니다. 시계와 전화와 개와 피아노는 모두 일상 삶의 지속성을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화자는 죽음의 충격 때문에 삶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시간은 정지되어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2연
2연에서 화자의 지시는 주변으로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확대됩니다. 죽은 사람은 나만이 사랑했던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사랑했던 사람처럼 여겨집니다.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많은 사람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유명인사였을까요? 아니면 화자의 개인적인 슬픔이 너무 큰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위해 슬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비행기와 공공 비둘기들이나 교통경찰관들도 이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표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행기가 나오기 시작했던 초창기인데도 비행기가 하늘에 글자를 써야 한다는 발상은 화자의 슬픔을 나타내는 극단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3연
죽은 사람은 나의 동서남북이었습니다다. (영어의 어법은 동서남북이 아니고 북남동서입니다.) 이 말은 죽은 사람이 화자에게 삶의 방향과 지표였음을 뜻하는 말일 것입니다. 또한 죽은 사람은 working week, 그러니까 일하는 월화수목금토였고, 그리고 Sunday rest, 곧 일요일의 휴식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화자의 일과 휴식, 일상의 삶 자체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정오와 자정, 그러니까 화자의 삶의 시간에서 절정의 순간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대화의 상대, 노래의 대상이었습니다. 나의 생각과 철학을 형성해 준 존재, 내가 찬양하는 존재라는 뜻이겠습니다. 그런데 화자는 그에 대한 사랑이 영원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이 죽음으로써 그것은 영원하지 못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4연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으니 화자에게는 그를 둘러싼 자연이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했을 때는 자연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여겨졌고, 의미 있게 여겨졌었습니다. 별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헤아리는 것들입니다. 별은 그리움과 영원을 상징합니다. 허나 이제 그것들은 소용없게 되었으니 꺼버리라고 합니다. 밤의 낭만과 빛인 달도, 낮의 빛과 에너지인 해도 소용없게 되었습니다. 대양도 숲도 소용없으니 다 없애버리라 합니다. 삶에 의미와 의욕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아무 것도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시는 상실의 슬픔과 충격을 극단적 수사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수사법은 죽은 사람이 화자에게 삶의 모든 것, 삶과 세계와 자연을 의미 있게 해 주었던 유일한 것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앤 섹스턴(Anne Sexton)이 그녀의 애도시인 “죽은 자의 진실(The Truth the Dead Know)”에서 보여준 억제된 표현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화자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슬픔이 얼마나 큰가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표현하면서 갖가지 최상급을 동원하였던 엘리자베스 브라우닝(Elizabeth Browning)의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구요?(How Do I Love Thee?)”의 화법을 연상시킵니다.

하지만 이 시를 전혀 달리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시는 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라는 것입니다. 이 시가 1936년에 발표되었고 20세기 전반기가 전통적인 신의 죽음과 1차 대전이라는 비극을 겪고 난 뒤라는 점을 고려하여 그러한 해석이 내려질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삶의 지침을 부여하고, 인간에게 사랑을 베푸는 존재였던 기독교적 신은 19세기 후반기 이후 과학이 발달하면서 부정되기 시작했고 20세기의 서구철학은 “신은 죽었다”는 명제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신을 잃은 인간은 정신적으로 황폐해지고(T. S. 엘리엇의 ‘황무지’의 주제) 삶의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1920년대의 ‘길 잃은 세대’의 배경). 그리고 세계대전과 같은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오든의 이 시도 신을 잃음으로써 삶의 방향과 의미를 잃어버린 현대인이 신의 상실을 애도하는 시라는 것입니다. 2연의 내용, 그러니까 만인이 애도해야 한다는 식의 표현이 이 시가 특별한 개인의 죽음을 넘어서는 죽음을 암시한다고 보면 그런 해석도 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오든이 1930년대에는 종교적이기보다는 사회주의적이고 정신병리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꼭 그렇게 해석해야 될지는 의문입니다. 물론 오든은 후기에 기독교적 사상이 농후해진 시들을 많이 썼습니다. 하여간 시의 배경에 대해서는 더 전문적인 연구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일반 독자들로서는 이 시를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에 대한 애도시로 봐서 문제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