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호텔 지배인 구스타브로 등장하는 배우의 이름은?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주저 없이 ‘랄프 파인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영화 포스터에 그렇게 소개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나 어떤 사람은 ‘랠프 파인즈’라고 대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잉글리시 페이션트”에 나왔던 그의 이름을 랠프 파인즈로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그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름의 발음과 관계된 문제라면, 랄프 파인즈일까, 랠프 파인즈일까요. 이렇게 물으면 그건 영국식 발음과 미국식 발음의 차이일 뿐이니 둘 다 맞다고 대답할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의 발음은 과거의 오류를 수정한 것으로 생각하고 ‘랄프’가 맞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정답은 ‘레이프 파인즈.’ (Ralph Fiennes /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레이프 파인스)
모두가 고개를 갸우뚱거릴지 모릅니다. 레이프라니, 스펠링이 Ralph라면 랄프든 랠프든 둘 중 하나여야 하지 않는가, 하고서 말이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 이름 발음은 일반 발음 규칙을 따르지 않습니다.
Ralph라는 이름의 표준 발음은 영미에서 모두 ‘랠프’입니다. 널리 알려진 미국의 시인이자 철학자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과 “보이지 않는 인간”을 쓴 소설가 랠프 엘리슨(Ralph Ellison)을 떠올리면 Ralph라는 이름이 ‘랠프’로 발음되는 게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랄프’라고도 발음할 수는 있지만 표준 발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저 배우의 이름은 왜 ‘레이프’라고 발음해야 할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그 배우의 집안에서 그 이름을 그렇게 발음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2. 영어의 발음은 철자와 발음이 늘 1:1로 대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Ralph라는 이름의 발음은 원래 “레이프”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철자와 발음을 맞추려는 대중의 경향에 따라 발음이 ‘랠프’로 변했습니다. 하지만 파인즈 집안은 전통적인 발음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지요. 일반 어휘의 발음은 변하면 변하는 대로 일반화된 발음을 따르게 되지만 사람의 이름은 대중의 것이 아니므로 대중의 발음을 따르지 않고 특별한 발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같은 철자의 발음도 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사용자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1번 <그 배우의 집안에서 그 이름을 그렇게 발음하기로 했다>의 이유에 대한 보충 설명. 사람 이름은 철자가 같다고 하더라도 출신 지역의 발음을 그대로 따르거나 다른 집안,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해 발음을 달리하는 수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작고한 미국 대통령 Reagan의 경우겠네요. Reagan이라는 성은 영어권에서 ‘리건’이라고 발음하는 게 보통인데 당사자는 ‘레이건’이라고 발음했습니다.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우리나라 신문들은 그의 이름을 ‘로널드 리건’ 대통령이라고 표기하였으나 나중에 그 성이 ‘레이건’이라고 발음된다는 사실을 알고 모두 이름 표기를 바꿨던 일이 있습니다. 이 발음을 두고 영어권 사람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습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 배우였을 때는 ‘리건’이라고 하다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레이건’이라고 했다거나 그가 배우였을 때 존 웨인이 그를 ‘리건’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거나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남들이 아무리 그렇게 떠들어도 소용없지요. 당사자가 그렇게 발음하겠다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자기 성을 그렇게 발음하는 이유를 설명한 적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언어에 조예가 있는 사람들은 그 발음이 대통령의 아일랜드 혈통과 관계가 있으리라 추정합니다. 아일랜드 영어에서는 -ea- 발음이 ‘에이’ 발음으로 나는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아일랜드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와 셰이머스 히니(Seamus Heaney)의 이름입니다. 셰이머스 히니의 경우 성과 이름에 모두 -ea-가 들어 있는데 앞에서는 ‘에이’로 발음하고 뒤에서는 ‘이’라고 발음합니다. 영어의 철자-발음 사이에는 일관성이 없습니다.
영어 모음 글자는 여러 가지로 발음된다
2번 <영어의 발음은 철자와 발음이 늘 1:1로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의 이유에 대한 보충 설명. 영어에서는 철자와 발음이 늘 1:1로 대응하지는 않습니다. 같은 글자가 여러 가지로 발음되지요. 사실 로마자를 사용하는 언어치고 영어처럼 철자와 발음 관계가 뒤죽박죽인 언어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같은 로마자를 사용하는 스페인어, 이탈리아어는 철자와 발음이 거의 1:1의 관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글자의 음가에 대한 기본 규칙을 알면 누구나 그 언어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지요. 그래서 이런 나라의 사전에는 단어들 다음에 발음기호 표시가 없습니다. 영어는 하나의 모음이 여러 가지로 발음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아요. 예를 들면 로마자 a는 다른 유럽 언어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아’라고 발음되지만, 영어에서는 앞뒤에 어떤 자음, 어떤 모음이 오느냐에 따라 ‘아’, ‘애’, ‘어’, ‘오’, ‘에이’, ‘에어’, ‘이’ 등 거의 모든 모음으로 발음됩니다.

a자와 관련된 발음이 일관성이 없다는 것은 배우 Lindsay Lohan의 이름 발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경우에는 성과 이름에 모두 a자가 들어 있는데 발음이 같지 않지요.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이 가수의 이름을 대체로 ‘린제이 로한’이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래어 표기 규정에 따르면 ‘린드지 로언’ 또는 ‘린지 로언’이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린제이 로한’이라고 표기한 기자가 Lindsay에서 d 발음의 표기를 생략한 것은 신경을 쓴 거지만 -say 부분을 ‘지’라고 읽지 않고 ‘제이’라고 읽어 버린 것은 무신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한’의 경우는 다른 문제가 있으므로 뒤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ay라는 글자 조합이 위에서 예를 든 것처럼 ‘에이’로 발음되는 경우가 많기는 합니다. 기초 영어 단어 day, say, play에서만 보더라도 -ay는 ‘에이’ 발음이 많지요. 문제는 영어 모음 발음에서 그런 일관성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 이름의 경우에는요. Lindsay의 경우, -d-는 앞에 있는 n과 동화되어 발음이 들리지 않거나 생략될 수 있고 -s-는 앞뒤 유성음의 영향을 받아 유성화되어 z처럼 발음되며 -ay는, 요일 이름 끝에서처럼 ‘이’ 발음이 납니다. 그래서 ‘린지’가 되는 것입니다. Lindsay Lohan 정도면 이제 국제적으로 알려질 만큼 알려진 사람이니 지금쯤은 발음표기가 바로 되어야 할 텐데 그렇지가 않네요.
Ralph Fiennes의 성에 해당하는 부분의 발음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따지고 보면 Fiennes의 발음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 Fiennes의 발음에서는 혼란이 적은 것일까요? 역설적이지만 이 부분의 발음이 Ralph보다 더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Ralph라는 이름은 다른 유명인들이 “랠프”라고 발음하기도 하고 눈으로 보아서 그 발음이 크게 어려워 보이지도 않지요. 그에 비해 Fiennes라는 이름은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얼른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피언즈”라고 해야 할지 “피니즈”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렵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 이름의 발음을 알려고 사전도 찾아보고 검색도 해 보고 발음이 “파인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이름은 어려운 철자로 되어 있어 오히려 올바른 발음으로 통용되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Fiennes에서 -ie- 부분을 “아이”라고 발음하는 것이 낯설게 여겨지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영어의 기본 단어에도 이 발음이 들어 있다는 걸 기억해낼 수 있지요. die, lie, pie, tie 등에서는 ie 글자 조합이 모두 “아이”로 발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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